영성

1. 살아계신 그리스도 체험영성(이것이 수도회의 핵심 영성이다.)

우리 그리스도는 인간의 관념속에, 교리속에, 책속에 장식품처럼 죽어 있지 않다.
살아계신 그리스도는 표징을 통해 나타난다. 표징은 하느님을 드러내는 영적 기적을 말한다. 일상속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표징은 옆형제, 성체, 성서(통찰), 가난한이, 고통이다.
이것들이 바로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나타남이다. 그러므로 옆형제, 성체, 통찰을 제시하는 성서, 가난한이, 고통을 깊이 들여다 볼때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깊이 들여다 보는 것이다.

  • 1옆 형제속에 살아계신 그리스도

마귀에게 사로 잡히는 것이 마귀를 체험하는 일인것처럼, 그리스도께 사로잡힐때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도자는 옆 형제에게서 계속적으로 죽음을 초월하는 모습, 지극정성으로 봉사하는 모습, 친절, 온유의 모습, 비우고 내어주는 모습을 확인해야 한다.
옆 형제의 결점, 약점은 바라보기보다 그 속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바라 보아야 한다.

  • 1성체속에 살아계신 그리스도

꽃 한송이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는 순간 성변화를 일으켜 단순한 꽃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을 지닌 피조물이 된다.
성체는 성변화된 하느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성체는 비우고 내어주는 모양으로 존재하시는 그리스도, 하느님이시다.

  • 1통찰을 제시하는 성서속에 살아계신 그리스도

하느님 말씀은 빈 메아리가 아니라 내적 변화를 일으키는 기적의 말씀이다. 성서를 영적통찰의 눈으로 읽으면 그리스도가 우리의 내면을 영적으로 변화시킨다.

  • 1가난한이 속에 살아계신 그리스도

우리는 교회의 칠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현존속으로들어간다. 그런데 가난한 이는 참으로 그리스도의 현존이다.
가난한 이는 살아계신 그리스도이며,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주는 성사, 여덟 번째 성사이다.
가난한 이가 그리스도의 현존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난한이 속에 살아계실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고, 또 그리스도 삶의 모습을 재현하기 때문이다.가난한 이는 그리스도처럼 인생의 고통을 수용하고, 낮은자로써 살아간다. 남에게 봉사할때도 자신의 처지에 무관하면서 웃으면서 봉사를 한다. 봉사를 하면서도 칭찬 받으려고 하지 않고 봉사한 후에는 봉사했다는 사실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다. 이런 가난한이의 모습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우리는 가난한이 속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확인하면서 그들을 존경하고 그들을 예배한다.

  • 1고통속에 살아계신 그리스도

우리는 고통의 틈새에서 빛나는 은총에 민감해야한다. 고통은 은총을 더욱 빛나게 해 주는 것이다. 육체적으로도 아플때 더욱 창조의 아름다움에 감사하게 된다. 고통은 사람들 안에서 위안을 찾을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위안을 구하는 것이 쓸데없음을 알게 한다. 겟세마니 동산의 예수님처럼 하느님 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한다. 그러므로 고통은 다만 고통이 아니라 은총과 신뢰를 가져오게 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그리스도는 고통, 특별히 십자가 고통을 통해 하느님을 더욱더 신뢰하셨고, 인류구원의 은총을 확인하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은 인류 고통의 대표성을 지닌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일상의 고통을 겪을때, 그것은 누군가의 고통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은 십자가상에서 기도하신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기도의 소임을 동시에 이룩하는 것이다.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체험 영성은 자신의 존재를 부차적으로 생각하는 또 다르 기적을 체험시킨다.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옆형제, 성체, 성서, 가난한이, 고통이라는 표징을 통하여 우리의 자아의식은 저절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의식이 들어온다.

2. 참 생명과 일치 영성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체험하면서 살 때 자연스럽게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거짓 생명의 모습에 집작하지 않고, 참 생명인 하느님, 사랑, 가난한이의 생명속으로 들어가 그 생명과의 일치를 추구하게 된다.

3. 기쁨영성

우리의 기쁨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현존, 하느님의 현동이다. 축하는 어떤것이 거기에 있기에 그것을 축하하는 것이다. 무엇이 우리 앞에 있기에 이 삶을 축하해야 하는가? 바로 우리 삶속에 그리스도가 현존하시고 하느님 사랑이 현동하기 때문이다.